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프랑스 제4공화국 (문단 편집) == 정치 == 프랑스 제4공화국은 [[양원제]]와 [[의원내각제]]를 정치적 기반으로 건설됐다. 명목상으로 국가 원수는 여전히 [[프랑스 대통령|대통령]]이 수행하였지만 의회에서 선출되는 상징적인 존재로, '''실권은 [[총리]]에게 주어졌다.''' 실질적 국가원수였던 총리에게는 내각 임명권과 [[내각불신임결의|신임안]] 제청권이 주어졌으며, 제3공화국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치상[* 제3공화국은 70년 동안 내각이 104번 바뀌었다. 평균적으로 8개월에 한 번꼴로 내각이 엎어진 셈. 오죽하면 [[프랭클린 루즈벨트]] 미국 대통령이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드골한테 '프랑스는 수상이 너무 자주 바뀌어서 기억이 안 난다'고 할 정도. 물론 그래도 70년 가까이 굴러간 걸 보면 혼란스러웠다는 것도 좀 주관적이긴 하다. 실제 제3공화국 시절은 [[벨 에포크]]라 불리는 번영기였으며, 프랑스 공화정 역사상 최초의 안정적 집권기라고 평가받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제4공화국도 제3공화국과 마찬가지로 의원내각제가 채택된 것. 다만 최후가 [[프랑스 침공|나치한테 털리는]] 것으로 끝나다 보니 일각의 부정적 인식도 생겨난 것으로 보인다.]에 대한 반성으로 내각 구성원들에 대한 보호 장치가 대폭 강화됐다. 대통령제와 달리 내각제에서는 내각 구성원들이 의회에 종속된 관계이므로 아무래도 의회가 마음을 먹고 꼬장을 부리면 운신에 제한이 크게 걸릴 수 밖에 없기 때문. 다만 이렇게 만반의 준비를 갖췄음에도, 초대 총리였던 폴 라마디에가 의회에게 단순히 총리 선출권 뿐만이 아니라 총리가 조각한 내각에 대한 동의안까지도 제출하는 '''선례'''를 만들면서, 이후 총리들은 내각을 구성할 때마다 의회에 동의를 구해야 했고, 군소정당이 난립했던 프랑스 제4공화국에서 이는 필연적으로 내각의 힘을 약화시킬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샤를 드골]]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계속해서 제4공화국을 반대하며 내각을 흔들었고[* 드골은 열렬한 [[대통령제]] 옹호자였고, 그래서 제4공화국 제헌의회와 대판 싸웠다. 드골은 제4공화국의 헌법에 대해 "프랑스인의 1/3은 체념해 버리고, 1/3은 거부하고, 나머지 1/3은 아예 무시해 버렸다."라고 빈정거리기도 했다.] [[SFIO]], [[프랑스 공산당|공산당]], [[급진당(프랑스)|급진당]], 대중공화운동, 농민과 소상공인들의 국민중심 사이에서도 내각 구성 등으로 갈등이 지속되었다. 그래도 정부 자체는 온건 세력들의 [[연립정부|연정]]을 통해서[* 보통은 사회당(당시에는 사회주의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과 [[급진사회당]], 대중공화운동(이후 민주중도로 개편되어 사라졌다)의 연합으로 정권이 구성되었다. 이를 Troisième Force, 한국어로 '제3세력'이라고 했다. 극 초반기에는 드골파와 공산당도 정권에 참여한 적이 있었지만 전자는 드골이 은퇴하면서, 후자는 연립정권에서 탈퇴하면서 정권에 참여하지 못하였다.] 어찌저찌 굴러가긴 했지만[* 대내적으론 전후 복구기였고, 대외적으론 친서방 반공정책을 펼쳤다. 물론 여기서 반공은 사회민주주의 말고 소련식 공산주의.] 내각은 여기도 13년 동안 23번 바뀌는 등 뒤숭숭한 와중에 정권 붕괴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 바로 프랑스 제국의 종말을 알린 [[인도차이나 전쟁]]과 [[알제리 전쟁]]이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